취호당 최재문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은 본관은 은진(恩津)·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으로 충북 옥천군 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친척인 송이창의 집에서 송준길(宋浚吉)과 함께 공부하며 대전 회덕(懷德) 송촌(宋村)·비래(飛來)·소제(蘇堤)등지로 옮겨 살았기에 세칭 회덕인 이라 하였다.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고 18세쯤에 송준길과 같이 연산(連山) 사계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아들 김집 문하에서 성리학과 예학을 동문수학하고,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급제했다. 1658년 이조판서 1668년 우의정 1673년 좌의정이 되어 조선 후기 정치적 집권층을 형성하였다. 그는 주자(朱子)의 일점일획까지 추종하는 성리학자로 조선 후기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럿을 때 서인 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 활동했다, 정치적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인이기도 했다.

우암은 학자로써 정치인으로 학문적 이상실현이 남들로부터 다소 비난을 사고있음을 알면서도 후세를 위해 '아니할 수 없는 일' '부득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는 '공적인 나, 큰 나'를 추구하며 집단주의에 매몰되지말고 '전체로서의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는 의(義)를 추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곧음(直)'을 종신토록 따르는 준칙으로 삼았다. 이 곧음은 그릇됨을 없애고 선함을 홀로 지키는 것, 곧 '마음이 곧고(心直), 몸이 곧고(身直), 곧지않음이 없음(無所不直)'의 경지이다. 사람이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도덕의 경지라고 강조하고 존주론적 의미의 도道 사상을 구현하려했다. 선생은 일생을 도道를 깨닫기 위해 노력했다. 한유(韓愈)의 말을 빌려 '성인의 道가 나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전해질 수 있다면 비록 만번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고 하며, 논어에서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는 공자의 조문도(朝聞道)정신을 교훈삼아 어려서부터 80이 넘는 나이까지 벗이나 문인에게 권면하면서 스스로 실천했음을 알 수 있다.

인조 대에 병자호란을 겪고, 효종의 와신상담(臥薪嘗膽)속에서 제기된 대청복수론(對淸復讐論)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의 이론을 정립하고, 대청 복수론은 북벌론(北伐論)으로 대명의리론은 존주론(尊周論)으로 이론의 틀을 형성하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조선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현종[조선](顯宗) 대에는 본격적으로 문화적화이론인 존주론을 강조하며 조선도 중화 문명의 실천자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명분으로 삼았다. 특히 우암이 주창한 춘추대의는 정조가 널리 현창하려 했던 시대정신이었다.

정조(正祖)는 왕명으로 송시열의 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215권 102책이란 방대한 저술을 간행하게 했다. 그에게 ‘송자(宋子)’라는 칭호를 붙였으니, 이는 공자, 맹자, 주자 등 역대 성현의 학통을 계승하여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제자들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권상하(權尙夏)는 송시열의 적전 제자로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등과 함께 강문팔학사로 일컬어져 기호학파에 학맥의 흐름이 되었으며, 호론(湖論)의 입장에서 철학적 사유를 발달시켰다. 한양과 그 주변에 거하던 김창협(金昌協), 이희조(李喜朝), 이단하(李端夏) 등의 낙론(洛論) 계열 제자들은 대대로 관료 생활을 하며 경화 사족으로서 우암이 남긴 정치이념을 실천했다.

우암의 저술은 방대했다. 『주자 대전차의』, 『주자어류 소분』, 『논 맹문의 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이 정서 분류』 등의 저작이 있어, 그가 평생 정립한 사상의 정수를 잘 전하고 있다. 한편 우암이 쓴 글 중에는 시대를 대표하는 정치가가 학문적 논술로 지은 비문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비문은 영고성쇠(榮枯盛衰)가문의 역사와 자존을 알리는 긍지이며 이 시대 사대부의 자랑이었다. 우암이 지은 신도비 유허비 묘정비 등이 무려 522편으로 조선 역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숫자다. 이는 학문에 뛰어난 선현을 기리는 학문적 접근 방식이었다.

우암이 남긴 비문은 그의 사상과 정신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며 그의 저술이 너무 많아 접근이 어려운 점을 고려하면 더욱더 그렇다고 말한다. 우암이 지은 비문 碑文 중에서 고려 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정몽주의 신도비, 도학 정치를 실현하고자 생명을 바친 조광조의 적려유허비, 영남학파의 한 축을 이룬 조식의 신도비, 조선 선비의 큰 스승 이황을 존숭하는 뜻을 담은 글 등이 있다. 그중 기호학파의 적통인 우암이 경쟁 관계였던 영남학파의 정점 퇴계 이황을 바라보는 학문적 냉정함. 송시열은 퇴계를 조선의 정통 도학을 잇고 지고의 학덕을 겸비한 스승으로 존경했다.

우암은 ‘퇴계 선생의 시를 써서 이자형에 주는 설’과 ‘퇴계 이 선생 진적인(眞蹟) 발(跋)’ 이란 글에서 존경과 추모의 마음을 담고 있다. 더욱이 ‘퇴계 이 선생 진적인 발’이란 글에는 “내가 며칠 동안 이(선생의 유묵)를 어루만지며 구경하다가 선생을 숭모하는 마음을 금치 못해 한 통을 모사해 산재(山齋)에 간직해 두었다”고 적고 있다. 퇴계에 대한 우암의 존경심이 읽히는 대목이다.

우암은 또 자신의 학문 연원인 이이와 김장생의 학문과 행적에 관한 자운서원 묘정비. 돈암서원 묘정비, 평생의 동반자 송준길의 신도비 등을 지었다. 우암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다 죽임을 당한 성삼문과 박팽년의 유허비를 지어 조선 초기의 절개를 상징했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시기 항전하거나 의병을 일으킨 이순신·조헌·권율·신립·송상현·정기룡 등에 관한 묘비나 신도비 등을 지어 국난에 목숨을 던진 충의 정신을 기렸다. 여성의 묘지문도 22편이나 전한다. 후세에 도(道)와 의(義)를 전하려는 지식인의 책무를 다 하려 했다.

하지만 비문으로 인하여 학문적. 정치적으로 갈라서는 일도 있었다. 윤선거(尹宣擧)의 묘갈명 내용의 수정을 거절한 이유로 윤증과 갈등을 빚으면서 우암은 이들 세력과는 학문적. 정치적으로 등을 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윤증 등이 윤휴와 같이 주자학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순한 무리들이라고 규정하고 적극적인 배척에 나섰다. 이로 인하여 서인은 우암임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少論)으로 분립되었다. 우암이 있는 곳에 학문이 있고 정치가 있으며 이 시대 학문적 정치적 논쟁의 진원지가 되었다. 우암은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이나 이름이 거론될 정도로 출중한 인물이었다. 동춘과 우암이 회덕향교를 출입하면서 향안과 청금록등을 만들었다. 양송이 향교 명륜당에서 경연을 하고 석전대제에 참석하여 의례를 봉행하면 조선정치가 화덕으로 쏠렸다. 따라서 회덕향교는 조선 최고의 향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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