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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동춘당 송준길의 정신은 가을물결 같고, 모습은 옥으로 다듬어 놓은 듯 인품이 남달랐다취호당 최재문 시인·대전유교문화진흥원 초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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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11.03  10: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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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호당 최재문 시인

전 대덕구의 원래 이름은 회덕懷德으로 그 뜻은 ‘덕을 품은 곳’이었다. 논어論語에서 “대인은 가슴에 덕을 품고, 소인은 가슴에 고향을 품는다. 즉 ”대인회덕 소인회토(大人懷德 小人懷土)라 했다. 회덕은 대전의 뿌리이고 회덕의 근원은 선비고을이다. 대전 선비정신의 뿌리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선생과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선생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하여 후학을 가르치다 가끔 회덕향교 명륜당에 향촌유림을 모아 예제나 예설을 강론 하고 향음주례를 시연하여 예법을 터득하게 하였으며 향안과 청금록을 만들어 유림을 결속하게 하였다. 춘추 석전대제에 헌관으로 참석하여 봉행하는 모범을 보였으며. 회덕향교는 동춘과 우암의 출입으로 조선 최고의 향교로 명성이 자자했다.

동춘당이 태어난 집은 서울 전능동 외가였다. 뒷날 스승이 된 김장생과 김집이 태어난 집이기도하다. 어머니는 광산光山 김씨金氏로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인 김계휘金繼輝의 종형제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사계는 동춘당의 외 당숙이다. 동춘당의 아버지 청좌공淸坐公 송이창宋爾昌은 일찍이 김계휘 이이李珥 송익필宋翼弼 서기徐起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성리학과 예학을 익히고 29세에 사마시에에 합격하여 찰방. 감찰, 직장, 현감등을 거쳐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지낸 분이다. 사후에는 이조판서의 증직을 받았다. 부친 송이창은 한성에 살다가 조부 송응서가 돌아가시자 세 살 때 동춘을 대리고 회덕으로 내려왔다.

동춘당은 천덕을 받고 태어나 외모나 정신세계가 보통사람과 많이 달랐다고 한다.

“가을 물결같은 정신으로, 옥으로 다듬어놓은 것 같은”인품이라 하였다. 동춘당이 8살이 되어서야 본격적인 글을 읽기 시작했다. 영민한 아들이 공부로 몸을 버릴까 염려한 아버지의 헤아림 때문이었다. 동춘과 우암은 형제처럼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두분은 같은 은진송씨 13촌 숙질간이 되며 명종때 병조판서를 지낸 이윤경李潤慶의 외 종손으로 이종 형제간이다. 이 들 사이의 평생에걸친 남다른 학문적 정치적 우의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어린 시절 동춘당과 함께 공부하며 한 살 위인 동춘에게 우암은 ‘춘형(春兄)’이라고 불렀다.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은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이다. 그는 은진 恩津을 관향으로 하고 회덕 송촌이 선향先鄕이다. 18세에 사계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 주자가례, 심경, 근사록, 등을 수학했다. 1624년 진사로서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인조 14년(1636년)에도 김상용金尙容의 천거로 충청도 예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후 고향에서 20여 년간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자신의 스승이었던 우암을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이조판서였던 김 집의 천거로 동춘도 출사했다. 이후 우암은 인조대의 간신 김자점이 영의정에 오르자 부당성에 항의해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동춘당 역시 1649년에 김자점을 탄핵하고 회덕으로 낙향했다. 생전에 동춘당은 대사헌을 스물여섯 차례, 참 찬을 열두 차례, 이조판서를 세 차례 제수받았다. 1659년 병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이조판서가 된 뒤 우참찬右參贊 좌참찬 겸 좨주祭酒 찬선贊善 등을 지냈고,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 文正이다.

조선 후기 우암은 학문과 정치적 논쟁의 진원지였다. 그에 반해, 동촌당은 온화한 성품으로 우암과 두 사람은 마치 한 나무에서 뻗은 두 가지처럼 나란히 세상의 물길을 헤쳐 갔다. 동춘당은 우암과 함께 율곡 이이 이래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 집의 학풍을 계승 하여 평생 학문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했다. 당시 율곡. 우계, 성혼, 송강 정철과 같이 서인에 속하였지만, 반대파인 동인 인사들과 소통하고자 많은 노력을 한 인물이 동촌당이다. 이 바탕에는 퇴계 이황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영남 남인의 거목 정경세鄭經世의 사위였던 탓에 영남학파에 두터운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정경세는 당시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었는데, 동춘당도 동서 화합을 위해 노력했다. 당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의 양대 학풍의 조화를 꾀하고 영남 예설禮說이나 예제禮制까지 과감하게 수용하여 기호에학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동춘당은 자기주장만을 고집하거나 남을 이기려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송시열과 함께 분열된 서인 세력을 규합하는 데 힘쓰는 한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가 제기되었을 때 남인南人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제를 관철하는 데 앞장섰다. 학문적으로는 송시열과 같은 경향의 성리학자로서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던 명 선비였다. 서풍에서도 송설체宋雪體와 한석봉 체를 토대로 안진경체顔眞卿體의 두꺼운 필력을 가미한 양송체兩宋體를 창안함으로써 조선 시대 선비 글씨의 한 전형을 제시하였다.

우암의 정치적 분쟁 중심에는 동춘당의 조정자 역할이 돋보였다. 지금은 우임-동촌으로 우암을 우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대에는 동촌당의 이름을 앞세웠다고 한다. 따라서 회덕향교 대성전에 배향한 동방18현 위차를 성균관 위차를 따르지 않고 우암 보다 동춘당을 위에 둔 것은 은진송씨 대종회의 합의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동춘당은 스승 사계를 닮아 성리학에 조예가 깊을 뿐만 아니라 예학에도 밝아, 나라의 전례典禮나 모든 행사의 절차를 그에게 물어 시행할 정도였다. 따라서 동춘당은 회덕을 넘어 조선의 큰선비로 존경받았다. 동춘당의 문인으로 남구만, 송규렴, 민유중, 조상우, 홍득우, 등이 있다. 동춘당은 유학의 긍극적 목적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수기안인修己安人 이라했다. 이때의 수기 치인治人이 안인安人으로 외연을 확장할 때 그 진정한 가치가 휙득되는 것이라 했다. 동춘당의 문인중 송규렴은 우암과 함께 3송이라 불릴만큼 큰 인물이다. 대의를 지키는 일에 죽음도 불사하는 정신, 시속時俗과 결코 타협하지 않은 기개와 청렴결백한 인품은 그를 지배하고 있는 예禮를 통한 덕성의 함양을 가르친 사계선생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최재문 시인, 대전유교문화진흥원 초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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