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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학의 산실 돈암서원과 양천 허씨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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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08  08: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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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호당 최재문(시인, 칼럼니스트)

예학 정신과 기호 문학의 성지 돈암서원은 사계 김장생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선생이 타계한 3년 후 1634년 창건된 것으로 김집, 송준길, 송시열, 등을 배향한 서원이다. 서원 서북쪽에 있던 바위 이름이 돈암이라 해 그 이름을 따 돈암서원이라 했다. 돈암서원의 현판은 이 서원의 문인인 우암 송시열 선생이 썼다.

돈암서원은 고정산 줄기가 이어지는 중간쯤에 자리하며, 동쪽 들판을 가로질러 연산 천이 흐르고 있다. 전면 좌측에 계룡산이 우람하게 에워싸고 우측에는 대둔산 기운이 보태고 있어 보기 드문 명당으로 꼽히고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고 보존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다,

서원의 주 교육시설을 중심으로 배향 공간과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체 교육 시설은 출입문인 입덕문을 지나면 중앙에 양성당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배열된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다.

양성당 앞에 원정비가 있으며 양성재 서편으로는 수많은 책판과 왕실의 하사품이 보존되어 있는 장판각이 자리하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 숭례사와 전사청을 볼 수 있고 매년 봄과 가을에 향사례를 지낸다. 돈암서원에서 가장 멋진 건물은 응도당 건물-. 응도당은 유생들을 가르치던 강당으로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연산 돈암서원과 광산 김씨를 이야기를 하면서 허씨 부인의 빼놓을 없다. 사계 김장생 선생의 7대 조모 양천 허씨 부인은 태조 때 대사헌을 지낸 허응(許應) 선생의 딸로 충청도관찰사 김약채의 아들 김문과 혼인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김문은 한림원에 출사했으나 뜻하지 않게 일찍 세상을 떠났다. 허씨 부인은 불과 17세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었다. 그러자 딸의 신세를 가엾게 여긴 친정 부모는 몰래 다른 곳으로 개가(改嫁)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고 다녔다. ‘죽더라도 김씨 가문에 가서 죽고 그 집의 귀신이 되겠다’며 일부종사를 다짐을 하는 터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허씨 부인은 그 길로 몸종 하나를 데리고 깊은 밤 몰래 친정집을 빠져나와 유복자인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안고, 시가(媤家)인 김문의 아버지 김약채(金若采)가 살고 있는 충남 연산(논산) 고정리(高井里)까지 500리 길를 걸어서 내려 왔다. 전설에 의하면 허씨 부인이 아들 철산을 안고 시가 가는 길은 발에 물집이 생기고,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몸종이 얻어다 주는 죽과 보리밥으로 주린 배를 채우며 걷고 또 걸었는데 먼발치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거리를 두고 같이 걸으면서 지켜주었다 한다. 연산 시댁에 무사히 도착하자 호랑이는 크게 한 번 울더니 곧바로 사라졌다는 일화가 있다.

허씨 부인은 남편도 없는 시댁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림살이를 돌보며 자식과 손자들의 교육에 남다른 정성을 쏟았다. 아들 철산은 안동 김씨와 혼인하고 국광, 겸광, 정광, 경광 4형제를 두어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아들 철산은 조정에 출사하여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손자 국광은 조선 5백년 역사에 광산 김씨의 뿌리를 깊게 내린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세조 13년 병조판서로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광김 최초의 우의정이 되었고, 그후 예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이 되었다. 성종 2년에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급에 책록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지는 영광을 얻었다.

오늘날 고정리 마을은 광산 김씨 입향조인 김약채에 이어 허씨 부인의 정절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씨 부인은 1455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이곳 고정산에 묻혔는데 그렇게 헌신적이고 훌륭한 삶이 임금에게 까지 알려지자, 세조는 허씨 부인의 행장을 듣고 탄복해 하고 마을 입구에 정려(旌閭)를 세우고 정경부인(정1품)으로 추증(追贈)하여 정려를 모범으로 삼아 타의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양천 허씨의 7대손 김장생이 태어났다. 선생의 부친은 대사헌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우참찬 신영(申瑛)의 딸이며. 아들이 김은과 김집(金集)이었다. 1560년 김장생은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등 예학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李珥)의 문하에 들어갔다. 그의 학문의 중심은 예학이었다. 조선 중기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 되면서 성리학의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을 바탕으로 심성론(心性論)이 발달하게 되었다. 시대 조류에 따라 자연스럽게 심성론에 기반한 사회 윤리론인 예학의 발달을 유도하게 됐다. 곧 성리학의 이기심성론을 사회 윤리론으로 구체화한 것이 예학인 것으로, 성리학을 조선화 해 가는 과정에서 예학이 발달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선생은 학문적으로 송익필 이이 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예학(禮學)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사계의 문하에는 학운이 융성하여 제자로 아들이자 학문의 정통을 이은 김집과 송시열을 비롯해서 송준길, 이유태, 강석기, 장유 등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고, 후일 서인과 노론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특히 기라성 같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중 권상하,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이간(李柬)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들이 대표적이며, 이들의 문인들이 비로소 조선 후기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성리학의 주류를 이뤘다.

사계는 조정에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아 부임 하였지만 향리에서 학문 수학에 보낸 날이 더 많았다, 사계의 영향력은 율곡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李貴)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광산 김씨를 흔히 광김(光金)이라고도 하는데 세도가 당당했던 집안이라기보다는 대대로 석학(碩學) 거유(巨儒)를 많이 배출한 명문으로 알면 되겠다.

조선 왕조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 원리를 유교로 삼고 덕치주의와 민본 사상을 기본으로 왕도 정치를 실현하는 데 이상을 두었다. 따라서 김장생은 ‘예가 바로 서면 국가도 바로 서고, 예를 잃으면 국가도 혼란해진다’고 여겼다. 예를 국가 치란(治亂)의 핵심으로, 예교(禮敎)를 치국(治國)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도덕과 윤리를 실천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는 예학을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특히 율곡 선생의 제자로서 선생이 소학에 주설(註說)을 달은 소학제가집주(小學諸家集註) 등 선생의 사상과 이론을 계승 발전하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김장생은 구봉 송익필과 율곡 이이 선생의 학문에서 그 적통(嫡統)을 이어받아 예학을 정비한 한국 예학의 종장이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국가정신과 사회발전의 방향을 재시한 선구자이다. 그의 예학은 주자가례에 기본을 두고 있다. 즉 그의 예서에는 주자 가례를 고례로서 고증하여 보완하였으며 체계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선생의 인간관은 예(禮)와 의리(義理)를 실천해야 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훌륭한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양란 이후 국란을 극복하고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의 국제질서가 새롭게 재편되어 가던 상황 하에서 성리학과 의리학을 바탕으로 예학(禮學)을 발전시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던 국가를 재건하고 전 세계의 평화질서를 만들어 가려한 전형적인 조선 지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기울어져 가는 조선사회와 문화의 방향을 인의(仁義)의 인간, 인륜(人倫)과 예의(禮義)의 사회로 제시하고 그렇게 다시 재건하고자 했다

선생은 인간이 어질고 바른 마음은 지속적으로 예를 실천하여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지속적으로 예를 실천하면 인간이 타고난 선한 본성을 더욱 계발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전체 사회 구성원이 모두 자기본성의 선함을 타인에게 베푸는 아름다운 인간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예는 사회적 의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예를 실천하는 삶을 통하여 자기본연의 선한 본성을 깨닫고, 자기 욕구를 절제하여 타인의 욕구를 배려하는 정신을 길러나가는 도덕적 의미로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예를 행하는 삶은 자기를 성장시켜 가는 과정이 된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어내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남을 배려하고 자기를 절제하는 인격을 기르고 사이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가는 조화원리가 예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질고 바르게 대할 수 있도록 예를 베푸는 것이라 했다.

400여 년 전 학자가 생각하는 본성이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본성이 다를 바는 없지만, 그러나 사회가 각박하고 다원화 되고 조직적이며 감정이 매마른 사회, 환경이 도무지 인간적이지 않고 황폐한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 주는 시사점이 크다고 하겠다.

선생이 살아 있던 시대나 지금이나 단 한 가지 변하지 않은 불변의 원칙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일이다. 아마 이 원칙은 인간이 살아있는 한 불멸의 원칙이 될 것이다. 선생께서도 그 시대에 예학을 연구하면서 프로젝트 매니저가 되고 아들 김집을 수석 연구원으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 수많은 참여 연구원을 두어 누가 무슨 연구를 어떻게 했다는 연구총서를 남기는 선진적인 연구 기록과 그 예학을 행하는 프로토콜(protocol)을 만들고 표준화를 하는 등 사회과학 측면에서도 대단한 선구자였다. 조선예학의 산실 돈암서원에서 선생의 학문적 시상을 접하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선비로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게기로 삼으면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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