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민(자유기고가)

최영민(자유기고가)
최영민(자유기고가)

마음이 평온할 때와 달리 심사가 복잡하면 집안도 어수선하게 느껴진다. 방마다 채워진 가구며 잡다한 살림살이들이 정리되지 못한 마음인양 어지럽다. 덧셈보다 뺄셈의 삶을 원했고, 소비보다 절제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집안을 둘러보면 없어도 될 물건들이 많다. 잠시 머물다 오는 피정의 집 숙소는 작은 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다. 군더더기 없이 최소한의 필요로 꾸려진 공간에서 머물게 되면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게 되고, 침묵과 고요 속에서 채우는 결심보다 비우는 결심이 자연스럽다. 그 곳에선 햇빛과 바람에 몸을 맡긴 청보리가 누렇게 익어가듯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지 하는 마음이 생긴다.

젊은 날에는 빨리 나이 들었으면 하고 바랐다. 마흔 정도면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이 내 삶을 오롯이 살아갈 수 있겠거니 했는데, 막상 마흔 언덕에 올라보니 삶은 무풍지대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든 자기를 배신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살아가는 길뿐이라는 이정표 하나 발견했을 뿐이다. 이젠 삶은 거창한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내 앞에 주관적으로 펼쳐진 세계를 해석하고 감당하며 담담하게 끝까지 가보는 거라 생각한다. 다만 여행자의 배낭이 너무 무거우면 고역이니 짐을 줄여야 오래 걸을 수 있는 법, 물건도 생각도 다이어트가 필요하다.

 
 

M.B. 고프스타인의 그림책 <할머니의 저녁 식사>를 읽다보면 단순하고 규칙적인 일상이 고요하게 빛난다. 페이지 마다 흰 바탕에 검은색 가는 선 하나로 그려진 할머니의 생활은 사족이 없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한 뒤, 점심으로 먹을 과일을 조금 챙겨 배를 타고 호수로 나아가 하루 종일 머물다가,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잡은 물고기를 손질해서 굽고, 갓 구운 롤빵과 따끈한 차를 준비해 아주 천천히 저녁을 먹는다. 그리고 재빨리 설거지를 하고 다음 날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낚시하러 갈 수 있도록 잠을 잔다.

반복되는 삶을 정성스럽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힘은 어디에서 올까? 누구나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원하지만 사실 일상은 희노애락의 무한반복이다.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직후‘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불편한 진리를 설법하셨듯이 생의 기준값은 행복이 아니다. 그래서 아무 일없이 지나가는 하루는 매우 감사한 일이고, 그 감사함을 자꾸 까먹는 게 문제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강아지와 함께 산책을 하고, 집에 돌아와 신문을 읽고, 청소를 하며 시작하는 하루가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 호수 위에 작은 배를 띄우고 찰박찰박 낚싯대를 드리우다가 노을이 물들어가는 저녁 집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할머니의 모습과 내 모습을 겹쳐본다. 난 낚시는 흥미기 없으니 그림책 <도서관>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브라운처럼 평생 모은 책을 기증해서 도서관을 열고, 맘에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하루가 멀다하고 도서관에서 책 읽고 대화하며 늙어가도 좋겠다. 그렇게 살다가 신경림 시 <낙타>처럼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 특히 이렇게 달이 밝고 별이 총총한 밤에 떠난다면 얼마나 멋질까. 여행을 떠나기 전 집 정리는 필수니, 신박한 정리를 먼저 해볼까.

 
저작권자 © 계룡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