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민 논산계룡교육지원청 학교폭력심의위원장

나는 어쩌다 갈등의 한가운데에 서 있게 되었을까? 깨지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 갈등의 폭풍우 속으로 내 발로 걸어 들어갔으니 이런 걸 두고 제 발등 제가 찍는다고 하는 것인가? 갈등이란 말을 일상의 언어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때가 마흔을 막 앞두고 있을 때니 강산이 한 번 바뀌고도 세월이 더 흐른 지금도 나는 삶의 갈등을 샅바처럼 붙들고 씨름하고 있다.

내 갈등 한번 잘 다뤄보겠다고 시작한 일이 다른 사람의 갈등해결에 한발 두발 개입하기 시작해서 학교, 법원, 경찰청까지 확대되었다. 특히 작년부터는 학폭심의위원을 맡게 되었다. 학폭심의를 마치고 나면 며칠 동안은 조치 내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 듣고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더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거나 성찰의 시간이 되도록 도움을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 개별적인 가정환경과 변화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살아가야 할 학생들의 처지가 안타깝고 종국에는 좌절감이 밀려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사람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리둥절한 상태로 있을 뿐”이라던 소설 <자기 앞의 생>의 하밀 할아버지 말을 위안 삼을 뿐이다. 그래도 심의에 참여한 학생이 마음이 쓰여서 ‘학교로 편지라도 보낼까’ 하는 생각으로 밤늦은 시간까지 장문의 편지를 고심고심 써보기도 하지만 아침이 되면 괜한 일 하는 게 아닌가 싶어 우편 발송을 포기한 일이 부지기수다. 전능하지 못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최선의 결과를 기대하며 주어진 사건에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생각해보면 갈등해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사람이 나였다. 어려서부터 내 주장을 제대로 내세운 적도 없고, 다른 사람들 의견을 따르는 양보 순응형 인간이었다. 그러다보니 누구와 싸울 일이 없었다. 사실 그게 문제였다. 싸울 때는 싸워야 하는데 너무나 쉽게 나를 내어주었고 포기했고 이를 양보하는 것인 양 합리화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망망대해 작은 배안에서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단 둘이 남게 되었을 때다.

오랑우탕과 얼룩말을 잡아먹은 호랑이를 길들이던 파이는 배의 한쪽 편에 먹이를 던져주고 장대로 먹이가 있는 곳을 탁탁 치며 “거기가 네 자리고, 여긴 내 자리다.” 하고 경계를 명확히 한다. 너와 나의 존엄의 경계가 뚜렷해야 평화로움이 유지되는 것이다.

갈등과 폭력으로 얼룩진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지나치게 착하고 양보만 하거나,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경우가 있다. 이들은 겉으로 드러난 증상은 다르지만 원인은 같다. 1차적으로 존엄 훼손과 침해의 경험이 있다. 2차적으로는 훼손과 침해가 지속되면 존엄의 경계는 모호해진다.

굴욕감이나 수치심을 스스로 삼켜 버리거나 타인을 향해 내뱉는다. 뱡향만 다를 뿐이다. 삼키는 사람은 희생양이 되기 쉽고 내뱉는 사람은 ‘자신의 병든 자아를 방어하고 보전하려는 목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파괴한다.’

모두 개별적인 사람과 사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비슷한 일로 싸우고 미워하고 관계를 망친다. 상대방이 원해서, 하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사건에 연루되었노라고 말하는 경우도 흔히 본다.

상대방이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에 용서할 수 없노라고 말한다. 용서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다.

그들을 대할 때면 이제는 드러난 사건의 배후에 이미 잠재된 수치심과 상처들이 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더 안타깝다.

예전에 내 모습이 그랬다. 피해의식으로 가득 찼었고, 책임을 회피했고, 내가 아니라 상대방이 변해야 했다. 그러던 내가 타인의 고통을 어루만지고 위로하며, 경청하고 질문하며 갈등의 한가운데 서 있기를 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 안에 없는 것을 볼 수 없고, 내 안에 없는 것을 줄 수 없는 것이 삶의 이치임을 안다. 내가 제 발로 갈등의 폭풍우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필연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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