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용 시의원(논산시의회)

2017년 희망찬 새 아침이 밝았다. 그 어느 때 보다 다사다난 했던 2016년을 보내서인지 새해가 더욱 남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해의 슬픔, 절망, 분노 등 어두운 것들은 어둠속에 던져버리고 밝아오는 새해는 새 희망으로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야할 것이다.

최근 들어 현대판 진령군에 비유되는 사건으로 말미암아 국회, 언론, 국민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협치라는 용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면, 협치라는 용어는 무슨 뜻이고 어디에서 처음 사용된 것일까? 협치라는 용어는 1885년 영국의 역사가인 찰스 플러머가 저술한 “영국의 거버넌스”에서 처음 사용됐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협치의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 UN, IMF, 세계은행 등과 같은 국제기구에 의해서다.

협치는 협력적 통치의 준말로 사회 내 다양한 기관이 자율성을 갖고 공동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통치방식으로 정부 일방의 통치가 아닌 참여와 자율, 분권과 협력, 공동의 의무와 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국가운영을 뜻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협치라는 용어가 사용됐을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정치를 도와서(영조실록,1753년), 협력해 힘써 다스린다면(순조실록,1812년), 정사가 잘되도록 도와(고종실록,1899년)라 하여 조선후기에 우리선조들은 협치(協治)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국정을 운영해 왔다.

이런 사료를 통해서 볼 때 우리선조들은 다른 나라 보다 130년 앞서 세계 최초로 협치라는 용어를 사용했고 1990년대 일본학자들이 거버넌스를 협치로 해석한 것보다 240년 앞서 협치의 용어를 사용했다는 중요한 사실이다.

<명심보감>에 이르길, '아픈 것은 피가 통하지 않기 때문(痛卽不通)'이라고 진단한다. 사람도 그렇지만 국가나 사회조직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소통이 되지 않아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은 위기에 빠져 두통거리가 된다. 소통은 세 가지 덕목을 필요로 한다. 비움, 귀 기울임 그리고 받아들임이다. 근래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면 유난히 소통이 아쉽다. 경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통의 필수 덕목이며 전제가 되는 경청이 어려운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첫째. 말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방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속으로는 자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상대방이 말을 하다가 한숨을 돌리는 사이에 '이때다'하면서 말을 가로챈다. 둘째. 귀를 기울이려면 많은 에너지와 집중력을 투자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말을 많이 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가 할 말을 생각하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넷째. 듣지 않고도 무슨 말이 나올지 잘 알고 있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칭기즈칸은 배운 게 없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항상 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계를 정복한 그는 "내 귀가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고 말했다.

탁월한 리더들은 말을 아끼는 대신 귀를 기울이고 질문을 많이 한다고 한다. 결국 경청을 통한 소통은, 화급한 문제에 불을 지르는 '방화'를 막아 '소방수'의 역할을 한다.

갈등을 더 이상 '조장'하지 않고 '조정'할 수 있다. 서로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상생의 앞길을 열어주는 '대문'이다. 경청은 소통을 낳고 소통이 잘되면 두통거리도 사라진다는 점을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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