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탓이오’  ‘물론 당신 책임도 있겠지만 그 보단 내 책임이 더 큽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미덕이자 도덕기준이고 철학이면서 실천해야 할 지고선(至高善)이다.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이므로 누구나 실수도 하고 과오도 저지른다. 더욱이 부(富)의 상한선이 없고 상속과 증여가 합법적이며 심지어 신분 세습까지도 용인되는 현대 사회에서 불평불만은 존재 할 수밖에 없다.

 사회생활 과정 중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경쟁구조에서의 문제에 대한 책임 회피와 방기는 어쩌면 인류가 시작한 그때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인간의 한계성과 특성으로 말미암은 원망과 책임 전가를 서양에서는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는 마태오 복음이 지침이 되어 왔다.

 동양에서는 ‘반구저기(反求諸己)’라 하여 어떤 일이 잘못 되었을 때 그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은 후 고친다 하였고 ‘반궁자문(反躬自問)’ 또는 ‘반궁자성(反躬自省)’이라 하여 돌이켜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자업자득(自業自得)’ 또한 같은 가르침으로 쓰였다.

 이와 함께 어떤 현상이나 사건사고가 발생한 경우 원인과 책임의 경중은 있을지 몰라도 특정인이나 집단만의 책임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책임이라는 의미로 ‘인인유책(人人有責)’이라 하였다.

 오늘 이 시점에서 성경과 고전이 더욱 새롭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은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는 안타까운 현상 때문이리라. 정치, 경제, 사회, 노사, 문화, 남북관계, 외교 등 전 분야에 걸쳐 네 탓 공방만 하는 것을 매일 매순간 보면서 20여 년 전 김수환 추기경께서 주창하신 ‘내 탓이오’ 운동이 다시금 절실한 시점이 아닌가 싶다.

 ‘내 탓이오’ 캠페인은 종교와 사상을 떠나 국민운동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을 중심으로 차량 뒷면 유리에 ‘내 탓이오’란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면서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돌이켜 보는 성찰의 계기가 되곤 했다.

 당시 한국사회는 오랜 군부 통치에 의한 억압과 통제, 부정부패, 그리고 감시체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욕구와 불만이 일거에 표출되는 상황이었고 지역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지난 과오나 실수를 인정하지도, 책임도 지지 않는 모습에 많은 이는 절망하고 분노하였다.

 또한 세계화라는 담론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개방만이 최선이고 경쟁과 효율성이 시대정신인 것처럼 되면서 사회는 급속히 개인주의로 전환되어 성찰의 미덕도 배려와 사색의 문화도 빠르게 퇴조하고 있었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전개된 ‘내 탓이오’ 운동은 안타깝게도 IMF를 거치면서 시들해져 실천적 사회운동으로 정착하지는 못했다. 미완의 운동으로 끝난 것은 국가부도와 가정해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은 와중에서도 책임지고 반성하고 사과하는 이 하나 없는 세상을 보면서 절망과 냉소, 분노와 공허가 인성을 압도한 결과였다.

 IMF 극복과정에서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지만 오히려 이를 기회로 삼은 이들은 많은 부를 챙겼다. 이전보다 더 심각한 부의 편중 현상을 보면서 ‘내 탓이오’는 설 자리를 잃었다.

 아이러니하게도 IMF는 빈부의 격차를 더욱 확대·고정화 하는 계기가 되었다. IMF라는 국난 와중에 재벌은 기존의 문어발식 경영에서 지네발식 경영으로 나아갔다. 형제자매, 아들은 물론 손자에 이르는 거대한 족벌 형성은 폐업과 실직, 취업난, 고용불안과 상관관계를 낳았고 이는 결국 양극화로 굳어졌다.

 자본이 인본을, 효율이 배려를, 경쟁이 상생을, 독점이 분배를 압도하는 상황에서는 ‘내 탓 보다는 네 탓, 국가 탓, 정치와 시스템 탓‘이 될 수밖에 없다. 상부상조와 나눔, 양보와 평등, 사랑과 용서, 인정(認定)과 존경이 넘치는 세상으로 ‘네 탓’만 난무하는 세상은 끝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진짜 ‘내 탓이오’라 말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시원한 계곡물만큼 참 많이 그리운 여름이다. 

/최헌묵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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