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전해진 용서에 관한 기록 중 가장 감동적인 사례의 전형(典型)이다.

극심한 고통의 상징인 십자가 형틀에 매달린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기 직전까지 한 일곱 가지 말, 이른 바 ’가상칠언(架上七言)’ 가운데 나오는 첫 구절이다.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 이들, 이들의 명령에 따라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 그리고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면 너도 구하고 우리도 구해보라.’고 한 이들을 향해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다’며 아버지(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조차 모르는 이들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자비를 드러낸 대목이다.

 이천 십 몇 년 전, 이른 봄 어느 날,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예수의 재판 문제로 온 도성이 술렁인다. 이는 유다 지도자들이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며 3년 여 동안 갈릴리와 유다, 사마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며 이 소식을 전하고, 온갖 기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예수의 행적이 자신들의 율법에 위배된다고 로마 총독에게 고발한  때문이다.

 예수의 하늘나라 소식 전파와 행적에 비위가 상한 대사제들과 율법학자 등 당시 유다 지도자들에게는 백성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예수가 눈의 기시였다. 게다가 많은 백성들이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는 예수야 말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존재로 여겨 어떻게든 예수를 함정에 빠트려 죽이려 한다. 마침내 그들은 ‘스스로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백성들을 현혹하고 있다’는 죄목, 소위 ‘하느님 모독죄(독성죄)’와 ‘백성 선동죄’를 걸어 예수를 빌라도 총독 앞에 세운다.

 ‘진리가 무엇이냐?,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냐?’고 묻는 총독의 질문에 침묵하는 예수에게 빌라도는 ‘내가 사람을 살리는 권한도 있고, 죽이는 권한도 있는 줄 모르느냐’며 채찍질과 가시관 씌우기 등 온갖 폭력으로 예수의 온몸을 상처 내고 피투성이로 만든다.

 예수가 유다 지도자들의 시기 때문에 고발당했음을 잘 알고 있는 빌라도는 유다 지도자들과 군중을 향해 ‘여러 차례 이 사람을 심문했지만 이 자에게서 도무지  어떤 죄목도 찾을 수 없다’며 ‘채찍질을 더 한 뒤 이 자를 풀어주겠다’고 한다.

 이때 유다 지도자와 군중이 한 목소리로 ‘저 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다. 죄 없는 예수를 살리려 했던 빌라도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유다인의 축제) 때 총독의 권한으로 중죄인 하나를 석방해주는 당시 유다 관례를 들어 폭동과 살인죄로 옥에 갇힌 바라빠를 십자가형에 처하고, 대신 예수를 풀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에 군중들은 악을 쓰며 ‘바라빠를 풀어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저 자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자손들이 지겠다. 우리의 왕은 카이자르(로마 황제) 밖에 없다’고 빌라도를 협박한다. 유다 지도자들의 뇌물을 받고 이들의 선동에 폭도로 변하다시피 한 군중의 위세와 협박에 굴복한 빌라도는 결국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예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다.

 십자가형 선고를 받은 예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자신이 처형될 ‘골고타(일명 해골산)’로 향한다. 빌라도 관저에서 골고타 언덕까지는 어른의 발걸음 폭으로 대략 1,317보(步), 800미터 거리다. 힘이 부쳐 기진한 예수는 길에서 세 번이나 쓰러진다. 아들의 고통을 함께하기 위해 따라나선 어머니 마리아를 길에서 만났을 땐 육체적 고통에다 심적 고통까지 더한다. 자신의 비참한 형색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도성 부녀자들을 향해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의 죄를 위해 울라’고 이들을 위로한다.

 이천 여 년이 지난 오늘에도 예루살렘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간 고난의 행적지 14곳(14처)이 순례자들의 묵상(?想) 터가 되고 있다.

 해골산에 이른 예수는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을 벗기는 치욕을 당한다. 이어 두 손과 발에 큰 못이 박혀 뚫리는 고통 속에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다. 예수의 십자가 밑에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마리아의 친척 등 몇몇이 슬픔에 잠겨 서 있다. 그 주위에는 갈릴리에서부터 예수 일행을 위해 봉사해온 부녀자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병사들, 주변 경비와 예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파견된 백인대장과 그 부하들, 유다 대사제와 율법학자, 구경꾼 등이 그의 최후를 지켜보고 있다.

                         -가상칠언(架上七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세 시간 여 동안 극심한 고통 속에 신음하다 숨을 거둔다. 고통 중에 한 말, 한 말 뗀 것이 바로 십자가 위에서 행한 일곱 이야기 ‘가상칠언’이다.

 첫 번째 말은 이미 언급했듯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가 23,43) 이다.

두 번째 말은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다(루가 23,43). 이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강도 중 하나가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달라’고 청원한 데 대한 예수의 응답이다. 이 응답은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 자비의 하느님으로 누구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하면 받아 준다는 구원의 예표(豫表)다.

 세 번째 말은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요한 19,26) 이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밑에는 ‘아들의 고통이 차라리 자신의 고통이기를 바라는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이 예수의 처참한 몰골을 바라보며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 죽음을 앞둔 예수는 홀로 남게 될 어머니를 보살피도록 어머니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로 삼도록 어머니와 요한에게 유언한다. ’이때부터 요한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요한복음(요한 19,27)’ 저자는 전한다.

 네 번째 말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태 15,34) 이다. 예수는 사형선고 전날 밤 ‘게세마니’라는 동산에서 자신이 겪을 수난의 고통을 내다보고 피땀을 흘리며 ‘나의 아버지! 아버지께는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시니 이 (고통의)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코 14,36) 하며 아버지를 향해 울부짖는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의 고통을 달게 받아들인 예수는 이제 자신의 목숨을  인간과 하느님과의 화해를 위한 제물로 바친다. 예수는 자신의 육신 생명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은 아들의 육신 생명마저 저버리게 함으로써 인류 구원 계획인 하늘나라가 시작되게 한 것이다.

 다섯 번째 말은 ‘목마르다’(요한 19,28) 이다. 두 손과 발이 못에 박힌 채 십자가에 매달려 피를 쏟은 예수에게 다가온 마지막 육체적 고통은 극심한 목마름이다. 세 끼니는 굶을 수 있어도 타들어가는 목을 축일 물 없이는 하루도 견디기 어려운 게 사람 목숨이다. 영성(靈性) 학자들은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겪은 목마름이야 말로 바로 인간으로부터 사랑받고자 하는 하느님의 끝없는 ‘사랑의 목마름’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여섯 번째 말은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이다. 이는 십자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뜻인 인류 구속 사업을 이뤘다는 말이다.

 일곱 번째 말은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 23,46) 이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예수는 이제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께 의탁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죽기까지 순명한 것이다.

                       -감동적인 용서 이야기들-

 가상칠언 중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구절은 제 1언(一言)으로,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요!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용서’에 관한 대목이다. 신약성경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여 ‘용서하라’는 메시지다.

 용서에 관한 기사는 성경 도처에 나온다. ‘간음하다 들킨 창녀’ 이야기,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는 베드로의 이야기 등등-. 특히 ‘왜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준 기도(일명 ‘주님의 기도’)에 잘 드러나 있다.

 간음하다 들켜 예수 앞에 세워진 창녀 이야기다. 예수에게 올가미를 씌워 당국에 고발할 구실을 찾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어느 날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데려와 예수 앞에 세웠다. ‘선생님, 우리 율법(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묻는다. 예수는 아무 말 없이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너희 중에 누구든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그들은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간음한 여자만이 남는다. ‘너의 죄를 묻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느냐?’는 예수의 물음에, 그 여자는 ‘주님! 아무도 없습니다.’고 대답한다. 예수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한 8,3-11)고 한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형제의 잘못을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 하는지’를 묻는 이야기다. 예수가 올리브 산에서 기도를 바치던 어느 날 베드로가 예수에게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만이면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에, 예수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한다.(마태오 18, 21-22)

 예수에게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제자의 이야기다. 어느 날 예수의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 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예수는 친히 자신의 기도를 가르쳐 준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로 시작되는 기도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기도를 ‘주님의 기도’ 또는 ‘주의 기도’라고 부른다. 이 기도문 가운데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루가 11,1-4, 마태오 6,9-15)’ 라는 대목이 나온다.

              -왜! ‘자신’과  ‘이웃’을 용서를 해야 하나?-

 이들 ‘용서 이야기’가 전하는 메시지는 세 가지다. 첫째, 간음하다 들킨 창녀가 자신의 목숨을 구한 것처럼 용서는 죽을 생명을 살린다는 것이다. 둘째,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처럼 용서의 횟수는 한정이 없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그 형제와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함은 물론, 하느님으로부터도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들 중 세 번째 사례가 바로 ‘주님의 기도’를 통해 전해준 ‘왜 용서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다. 이 용서의 모범을 몸소 보여 준 전형이 바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한 예수의 십자가상 ‘용서’다.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가능하다. 용서의 대상은 가족과 친지·동료·이웃 등 자신과 관계된 모든 사람이다. 그러나 이에 앞서 자기 자신부터 용서를 해야 상대를 용서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로부터 받은 이런 저런 마음의 상처로 원망과 미워함, 억울함과 분노를 삭이지 못해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처로 인한 고통은 자신만의 것은 아니다. 가족과 이웃 등도 나 또는 다른 상대로부터 상처 받고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심연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상대에 대한 원망과 증오, 억울함과 분노를 치유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치유의 첫 걸음이 바로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다. 자신을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에 대한 원망과 증오, 억울함과 분노가 오히려 지신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독이요 바이러스요 병균이기 때문이다. 자신부터 먼저 살아야 다른 이들도 용서할 수 있다. 자신부터 용서해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병든 자신의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길이다.  

 ‘용서’는 또 자신뿐 아니라 상대도 치유한다. 용서하는 자와 용서를 받는 자 모두 에게 화해와 평화의 선물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화해와 평화만이 사람에게 참 기쁨을 준다.

 오늘 날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운 것은 서로를 용서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2003년 이후 연속 10년 OECD 자살률 1위, 이혼율 1위, 보행자 사고율 1위 등이 단적인 사례들이다. 자살률이 높다는 것은 가족과 이웃으로부터 소외 받고 상처받은 이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 이혼율이 높다는 것은 서로를 용서하지 못 하는 부부가 많아 졌다는 얘기다. 보행자 사고율이 높은 것 또한 이웃의 허물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히 한국 사람에게는 치유를 필요로 하는 ‘분열’의 트라우마가 있다. 반일(反日) , 반공(反共), 보혁(保革) 및 동서(東西) 갈등 등이 그 것이다. 반일은 일제(日帝) 36년간의 억압통치에 의해, 반공은 동족상잔의 6·25 전쟁에 의해, 보혁 및 동서 갈등은 군부 독제와 민주화 과정 등에서 생겨난 부산물들이다.

 가진 자원도 변변치 않고 머리 하나만으로 먹고 사는 조그만 땅덩어리 나라에서 서로 용서하고 손잡고 나가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이런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개인과 지역사회, 국가 에너지가 낭비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이제 이런 트라우마에서 과감히 벗어나야 할 때다.

 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길이 용서다. 용서만이 나 자신과 우리, 사회, 나라의 건강을 찾게 하는 유일한 치유의 길이다.

          -‘기도’는 용서·화해·평화 위한 가장 강력한 무기-

 지난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북 화해와 평화를 위한 명동성당 미사에서 남과 북이 서로 용서할 것을 청하면서 한국의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겠다고 했다. 기도는 용서와 화해, 일치와 평화를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이요 무기다.

 나를, 우리를, 이 사회를, 그리고 이 나라,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가 온 누리에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 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용웅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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