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한 광장 모퉁이에서 ‘해가 어디서 뜨는 지’를 놓고 세 젊은이가 서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세 젊은이 중 하나는 산속 마을에서, 또 하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다른 하나는 도심에서 태어나 각자 사는 곳이 달랐다. 산속 마을에 사는 젊은이는 ‘해는 산 위에서’, 바닷가 마을에 사는 젊은이는 ‘해는 바다 위에서’, 도심에 사는 젊은이는 ‘해는 빌딩 위에서’ 뜬다며 서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마침 광장을 지나던 한 노인이 이 광경을 보고는 ‘왜들 이렇게 언성을 높여 싸우느냐’고 묻자, 세 젊은이 모두 서로가 질세라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산골 출신 젊은이가 “어르신, 해가 산 위에서 뜨는 게 맞죠.” 했다. 그러자 바닷가 마을 출신 젊은이가 ”아닙니다. 어르신, 해는 분명 바다 위에서 뜹니다.“고 했다. 이어 도심 출신 젊은이가 ”어르신은 이곳에 사시니 잘 아실 겁니다. 결단코 해는 빌딩 위에서 뜹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렇듯 세 젊은이의 주장은 제 각각이었다.

 세 젊은이의 주장을 듣고 난 노인은 “젊은이들!! 해가 산 위에서 뜨는 것도, 해가 바다 위에서 뜨는 것도, 해가 빌딩 위에서 뜨는 것도 다 맞다네. 그러니 이제 그만 싸움을 그치게!”

 이때 세 젊은이가 한 목소리로 “어르신, 해가 산 위에서 뜨는 것도 맞고, 바다 위에서 뜨는 것도 맞고, 빌딩 위에서 뜨는 것도 다 맞다 하시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며 노인의 모순(矛盾)된 대답에 이의를 달았다.

 이에 노인은 “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늙은이야, 이곳 도회지에서도, 깊은 산속 마을에서도, 바닷가 마을에서도 살아봐서 해가 어디서 떠서 어디로 지는 지 잘 알고 있네. 젊은이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니, 내 물음에 답한다면 자네들에게 이 모순에 대한 현답(賢答)을 주겠네.”

 한 목소리로 ‘그리 하겠다’는 세 젊은이의 대답에 노인은 “그렇다면 동서남북 가운데 해는 산 위 어느 쪽에서 뜨고, 바다 위 어느 쪽에서 뜨고, 빌딩 위 어느 쪽에서 뜨는 지, 또 동서남북 가운데 해는 산 위 어느 쪽으로 지고, 바다 위 어느 쪽으로 지고, 빌딩 위 어느 쪽으로 지는 지 대답해 보게!”

 노인의 이 물음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젊은이는 동시에 “네, 어르신,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집니다.”고 자신감에 넘쳐 대답을 해왔다.

 “내가 자네들에게 줄 현답은 없네. 왜 그런지 아나? 방금 자네들에게서 나온 대답이 바로 내가 주려던 답이기 때문이네. 자네들은 이미 해가 어디서 뜨는 지, 또 어디로 지는 지도 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문현답(愚問賢答)의 한 에피소드다-.

 똑같은 그 무엇인가를 보거나 듣고도 사람마다 느끼는 생각은 다르다. 생각이 다르다 함은 헤아리고 인식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고, 사리를 분간하고 구별하는 능력, 느낌이나 견해가 모두 다르다는 얘기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 일 등을 생각이라는 정신작용을 거쳐 배우고 경험하여 깨우치는 것이 바로 앎(지식)이다.

 이렇듯 생각은 앎에 이르는 근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영국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대로 누구나 ‘앎’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알아야 사리를 분별하고, 이 분별을 통해서만 논리를 세울 수 있다. 이 논리가 바탕이 돼야 판단이 가능하고, 판단이 서야 자신의 ‘주장’도 펼 수 있고 ‘선택’과 ‘행동’ 또한 가능하다.

 헌데 일상에 이 생각과 앎, 판단과 선택에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빙산의 일각’, ‘장님 코끼리 만지기’ 등의 말이 있듯 인간의 생각과 앎, 판단과 선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빛을 잃어 보지 못 하는 장님이 코끼리의 참 모습이 어떤 건지 알 수 없듯, 장님이 아닌 성한 이의 ‘앎’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난 극히 일부분의 빙산만을 보는 게 전부다. 이렇듯 각자의 생각과 앎에는 한계가 있다. 이런 한계성을 지닌 ‘앎’을 근거로 한 판단과 선택 역시 모순과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서로의 생각과 주장을 비우고 내려놓고, 버려야 한다. 상대방과 내 자신의 한계성을 서로 인정하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권을 비롯해 나라 지도층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은 달갑지도, 곱지도 않다. 이들 역시 국민들이 보내는 따가운 눈총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이 ‘눈총’이라는 화두를 통해 보내는 현문(賢問)에 그들은 여전히 ‘나 모르쇠’란 우답(愚答)으로 국민들을 실망시키고 있다. 정녕 언제쯤이나 이들이 제 정신을 차릴 지 참으로 답답하다.

 /이용웅 주필

저작권자 © 계룡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