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훈의사 생가지 터 현판식장면
한훈의사 생가지 터 현판식장면

34명 발굴…후손 찾지 못해 훈장 국가 보관
후손 찾기 운동, 계룡시 보훈단체 중심 전개

국방 도시인 계룡시에 살면서도 계룡지역 독립 운동사를 제대로 알고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사비를 들여가며 국가기록원, 안동독립기념관, 영주광복단기념관, 독립기념관 등을 두루 찾아 계룡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발굴 작업과 함께 계룡출신 34명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해낸 박상배 광복회 계룡시지회장을 만나 계룡지역의 항일독립운동 활동사를 소개한다.
본 자료는 계룡지역 독립유공자 후손 찾기에 도움을 주고자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가 제공한 계룡지역 항일독립운동 학술대회 기초 자료를 발췌 요약했다.[편집자 주]

▲의병전쟁에 참여한 계룡인
의병들은 활동지가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 계룡시가 면단위 규모라는 점에서 계룡지역 의병활동을 찾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각종 기록에 의하면 의병들은 1908년과 1909년에 두계 시장과 두마면 山所里를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계룡 출신으로 한말 의병전쟁에 참여한 이는 金光玉ㆍ洪順奉ㆍ金雲瑞 등이다. 그러나 김광옥(두마면 往峙)ㆍ홍순봉(두마면 莫隱洞)은 廉基俊 의병부대에 참여했으며, 진잠에서 자금을 모집했다는 기록 정도만이 찾아졌다. 김광옥과 홍순봉은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운서는 두마면 두계리 출신으로 李錫庸 의병부대에서 활동했다. 이석용 의병부대는 1907년 9월 전북 진안 마이산에서 거의했으며, 전북 임실을 비롯해 전북 동부지역의 유생과 농민, 천민층으로 구성된 의병부대였다. 김운서의 이석용 의병부대 참여는 김지수와 송병선과의 관계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석용은 송병선ㆍ기우만ㆍ최익현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더욱이 송병선으로부터 국가가 위급할 때 孝보다는 忠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깊이 새기고 있었다. 따라서 이석용이 의병을 봉기한 데는 송병선의 가르침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석용은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고, 고종을 강제퇴위 시키자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집했다. 김운서는 두마면 두계리 46번지에 거주했고, 김지수는 두계리 45번지에 거주했다.
따라서 김운서는 김지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김지수와 관계가 깊었던 송병선과의 관계에 의해 이석용 의병부대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운서는 이석용 의병이 해산된 후에도 1912년 10월 朴甫局ㆍ金必洙 등과 함께 장수군과 임실군 일대에서 군자금을 모금했으며, 이 과정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한 계룡인
군자금 모금은 독립 운동가들의 대표적인 활동 중 하나다.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따라서 독립운동단체들은 끊임없이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으며, 주요 대상은 국내였다. 국내에서의 군자금 모금은 1919년 3ㆍ1운동 후 활발히 전개되는 특징이 있었다.
계룡지역에는 鄭寅行ㆍ權忠洛ㆍ宋鍾斌 등이 군자금 모금 활동에 참여했다. 정인행은 두마면 용동리 출신으로 광복단 충청도지단에서 활동했다.
광복단 충청도지단은 1920년 10월 만주 독립운동단체인 광복단에서 파견한 金國景에 의해 조직됐다. 이후 김국경은 박재옥을 광복단 충청도지단장 책임을 맡기고 지단조직을 착수케 했다. 박재옥은 논산 일대에서 李周鎬ㆍ尹相肯ㆍ李承兆ㆍ姜榮羲ㆍ姜泰仁을 단원으로 모집하고 자금 모금 활동을 벌였다. 정인행은 이때 충청도 지단에 참여했다. 정인행과 함께 광복단 충청도지단에서 활동했던 윤상긍ㆍ이승조ㆍ강영희ㆍ강태인은 모두 논산 출신이다. 이들은 1920년 10월 다음과 같은 통고문을 논산군 일대 부호들에게 발송했다.
우리 조선민족은 적의 노예와 같은 자에 종속함은 참기 어려운 치욕으로 치욕을 면하자면 조국의 독립을 기도함이 최선의 급선무이다. 그러나 독립이 되자면 우선 자금이 충실하여야 될 터이니 유지에 대하여 모집하는 바이다.
충청도지단원들은 이 같은 통고문을 발송하고 이후에 찾아가 자금을 수령하는 방법으로 자금을 모금했다. 통고문은 논산군 일대의 부호들에게 발송됐으나 자금 모금은 성동면 부호 趙東始로부터 모금한 오백여원만이 확인된다. 정인행은 서울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원과 연계해 군자금 모금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20년 11월 체포됐고, 광복단 충청도지단도 해체되었다.
권충락은 두마면 석계리 출신으로 李萬俊과 함께 흥업단의 자금모금에 참여했다. 흥업단은 1919년 3월 만주 무송현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권충락은 1921년 8월 두계리 權安伊의 집에서 이만준의 권유를 받고 흥업단에 가입했다. 단원이 된 권충락은 權政洛ㆍ洪鐘洛을 가입시켰고, 홍종락은 金鍾萬ㆍ朴在華ㆍ梁漢緯를 단원으로 가입시켰다. 권충락은 1922년 1월 동지들과 대구 양한위의 집에서 군자금 모금을 협의하고, 홍종락 등과 경북 영천군 權周慶, 대구 달성의 崔在敎 등으로부터 자금을 모금했다. 그러나 1922년 5월 자금 모금을 하던 중 체포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년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충락은 1943년 3월 9일 대구의 결혼피로연 석상에서 일제의 가마니 강제 공출을 비난하고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죄목으로 또다시 체포돼 1943년 5월 14일 소위 ‘조선임시보안령’ 위반으로 6개월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송종빈은 두마면 향한리 출신으로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자금모집 활동에 참여했다. 조선독립단은 부적면 출신인 이내수가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이내수는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고 자결 순국한 이학순의 아들이다.
조선독립단은 이내수를 중심으로 朴魯東ㆍ金秉泰ㆍ權命相ㆍ洪承旭ㆍ鄭寅玉ㆍ任種龍 등 20여 명으로 조직됐으며, 충북ㆍ충남ㆍ경북 지역 출신들이 중심이었다.
송종빈은 조선독립단 결성 시기와 근거지와 관련해 주목된다. 조선독립단의 결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 이들의 군자금 모집활동은 1920∼21년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들은 1919년 3ㆍ1운동 후부터 활동계획을 모의한 것으로 보이며, 구체적인 활동은 1919년 權命相의 활동부터다. 그런데 당시 권명상이 조선독립단원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와 관련해 조선독립단의 주모자로 지목된 이내수의 활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내수는 조선독립을 목적을 달성하고자 기도한 주모자로 1910년 5월경 논산군 두마면 향한리 송종빈집 거실에서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윤상욱ㆍ정인옥ㆍ임형산ㆍ서봉산ㆍ이기중ㆍ하우형 등 함께 그 수행에 관한 자금 조달 모의를 획책했는데, 주목되는 점은 ‘宋鍾斌家’가 조선독립단의 근거지였다는 점이다. 송종빈가에서 단원들은 1919년부터 ‘조선독립 불온문서와 유고문, 군자금 수령증이 작성’ 등을 작성했다. 따라서 조선독립단의 결성 시기는 1919년으로 보여진다.
조선독립단원들은 전북 익산, 충남 논산ㆍ연기ㆍ공주ㆍ청양, 충북 영동ㆍ옥천ㆍ제천, 경북 문경ㆍ봉화, 강원 영월 등지에서 30여 차례 넘게 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름으로 격고문ㆍ유고문 등을 제작해 배포하며 자금을 모금했으며, 그때마다 송종빈가는 활동의 근거지로 이용됐다.
송종빈은 조선독립단에 참여해 단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지원활동을 벌였으며, 1921년 10월에는 이열호ㆍ김재천ㆍ선승기ㆍ김한복ㆍ임종만 등과 함께 전북 익산의 김용선으로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송종빈은 이와 같은 활동으로 체포돼 징역 3년의 옥고를 치렀다.

두계만세운동 재현 장면
두계만세운동 재현 장면

▲국내 비밀결사에 참여한 계룡인
국내 비밀결사에 참여한 계룡인은 한훈이다. 한훈은 충남 청양 출신으로 1906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 되자 閔宗植 의병진에 참여해 洪州城 공방전에서 활약했다. 이후 한훈은 고향인 청양을 떠나 신도안으로 이주해 한나철ㆍ윤이병ㆍ기산도 등과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오적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1913년 1월에는 蔡基中ㆍ庾昌淳ㆍ柳璋烈 등과 豊基에서 光復團을 조직했다. 1915년에는 대구에서 조직된 광복회에 참여해 전라도 지역에서 일본헌병 분대를 공격하고 친일파 처단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광복회가 1918년 1월 일제의 의해 와해되면서 만주로 망명했다.
한훈은 1920년 2월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광복단결사대 계획을 논의한 후 같은 해 3월 귀국해 박문용 등과 함께 광복단결사대를 조직했다. 광복단결사대는 조선총독 및 친일관리들의 처단과 자금모집을 목표로 정하고 활동을 시작했다. 한훈은 광복단결사대 결성 직후 고제신ㆍ임성태 등과 전북 전주ㆍ군산ㆍ김제, 전남 광주 등지에서 자금모집 활동을 벌였다.
광복단 결사대는 1920년 8월 김상옥의 암살단과 연합했다. 암살단과 연합한 광복단결사대는 1920년 8월 미국 의원단 방한 시 남대문역에서 폭탄을 투척하고 총격전을 벌여 환영 나온 조선총독 및 정무총감 등을 처단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미 의원단이 도착하기 하루 전인 8월 23일 일제의 예비 검속으로 한훈을 비롯한 단원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됐다.
한훈은 광복 후 광복단을 재건해 자주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추진하면서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재건된 광복단은 광복 정신의 철저화 운동ㆍ국민 조직의 단결화 운동ㆍ농촌산업의 건전화 운동ㆍ경제생활의 자력화 운동ㆍ민족문화의 창조화운동ㆍ세계일류의 평화화운동 등을 실천 강령으로 채택하고 光復義塾 설립, 實驗農場 설치, 동서문화연구회 조직 등을 계획하면서 민족교육과 산업 부흥을 이룩하고자 했다.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계룡인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계룡인은 무정부주의 운동을 벌인 이을규ㆍ이정규 형제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펼친 양기하이다. 이을규ㆍ이정규 형제는 입암리 출신이고, 양기하는 두계리 출신이다.
이을규는 1919년 4월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이하 대동단)에 참여했다. 대동단은 1919년 4월 全協ㆍ崔益煥 등이 金嘉鎭을 총재로 추대하고 결성한 비밀단체였다. 대동단은 독립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 각층의 인물들을 대동단에 가입시키며 독립전신을 고취하기 위해 임시정부와 연계한 선전활동을 벌였다.
대동단은 1919년 8월 국치일과 10월 일제의 천장절에 만세운동을 추진하며,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킬 계획을 추진했다. 이을규는 鄭南用과 함께 의친왕을 상해로 망명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을규는 11월 10일 의친왕과 함께 중국의 단동역에 도착했으나 이 사실을 탐지하고 추격한 일제경찰에 발각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이을규는 검거를 피했으나 1920년 12월 국내로 재입국하다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을규는 석방된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동생인 이정규와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이을규는 북경에서 이회영ㆍ신채호 등과 교류하며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이을규ㆍ정규 형제가 권력을 배제하고 자유연합ㆍ자유평등에 원리에 따라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무정부주의를 수용했던 것이다. 이을규ㆍ이정규 형제는 1924년 북경에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이을규ㆍ이정규 형제 외에 이회영ㆍ백정기ㆍ유자명ㆍ정화암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이을규ㆍ정규 형제는 정의공보 등을 발행하며 무정부주의 선전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은 자금 사정으로 활동을 지속하지 못했다. 이후 이을규ㆍ정규 형제는 북경에서 노동대학 설립에 참여했다. 이을규는 1927년 남경에서 신채호 등과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해 무정부주의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도모하던 중 김종진의 초청으로 김좌진이 주도하고 있던 신민부에 참여했다. 이을규는 1927년 7월 김종진ㆍ이강훈 등과 재만조선무정부주의 연맹을 결성하고, 신민부를 재만 동포들의 생존권 보장을 목표로 하는 한족총연합회로 개편하는 데 기여했다.
양기하는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ㆍ1독립운동 후 朴長浩ㆍ趙孟善ㆍ白三圭ㆍ全德元 등과 유하현에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하고 교통부장을 맡았다.
1921년에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22년 6월 9일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및 국무위원의 무능을 들어 安定根ㆍ趙尙燮ㆍ車利錫 등과 함께 不信任案을 제안하여 가결시키기도 했다. 1922년에는 김구와 한국노병회를 조직해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1924년 8월에는 만주로 건너가 김승학ㆍ이유필 등과 참의부를 조직하고 교육위원장을 맡아 항일투쟁을 벌였다. 1930년 이후에는 조선혁명당에 참여하여 양세봉ㆍ현익철 등과 함께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1932년 2월 10일 관전현에서 일본군과 만주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자랑스런 계룡인, 34명의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
계룡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연산군 두마면 지역으로 1개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3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독립운동 관련 행형기록이 찾아지는 인물도 34명에 이른다. 이렇듯 상당히 많은 계룡인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해, 한말의병전쟁, 자결 순국, 3ㆍ1운동, 비밀결사ㆍ군자금 모금 등 독립운동을 전개해 왔다.
이렇듯 계룡시는 계룡대가 위치하고 있어 국방 특례시가 됐듯이 운명처럼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이었다.
반면 이에 대한 연구는 지금껏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다행히 박상배 광복회 지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의 노력으로 34명의 독립운동가가 발굴됐다.(본문기사 참조)
박상배 광복회 지회장은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연구소 등의 도움을 받아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현장조사를 통해 어렵게 독립운동가 34명을 발굴했는데 안타까운 것은 후손 찾기가 더 힘들다”며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라도 후손 찾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고 이를 위한 각계각층의 제보와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밝혔다.
/전철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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