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계사년 원단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 해를 마감하는 시기다. 이틀 뒤 후엔 예수 성탄이고, 새해도 한 주 채 남지 않았다. 지구의 공전 시계가 노루꼬리 만큼 남은 석양을 향하고 있다. 저물어 가는 세모의 길목에서 올 한 해를 되돌아보고 희망찬 꿈을 갖고 새해를 맞는 것도 지혜로운 일일 게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아기 예수가 2000여 년 전 유다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탄생했을 때 하늘의 천사가 목동들에게 나타나 전한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이다.
하느님이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다

이 기쁜 소식은 바로 하느님이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시어 사람의 몸(육체)으로 이 세상에 왔다는 메시지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온 하느님이 곧 예수 그리스도요, 누구든 그를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복된 소식이다. 그럼에도 이 소식은 인간의 이성과 지성, 감성과 의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신비다. 너무나도 엉터리 같은 신비여서 인간에겐 아이러니요, 패러독스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스스로 잘 나고 똑똑하다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이 기쁜 소식을 바보처럼 어린아이처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바로 크리스천이요 그들의 신앙이다.
예수의 가르침과 생애를 기록한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 등 복음사가(福音史家)들이 전하는 한결같은 메시지는 ‘사랑’이다. 이들이 전하는 첫째가는 사랑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 사랑하는 아들까지 이 세상에 보내준 하느님의 크나 큰 사랑이다. 둘째는 하느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인간도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것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인간 서로의 사랑 통해 가능

그렇다면 네 이웃은 누구인가?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베푼 것이 바로 나(하느님)에게 베푼 것’이라는 성경 말씀처럼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옥에 갇히고, 법과 정의에서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 등등 바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다. 하느님은 볼 수도 보이지도 않은 존재다.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웃)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완성된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이요 위선이다.

사랑은 자기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것

세상은 평화를 목말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세상은 빈곤과 기아, 분열과 다툼, 전쟁 등으로 지구촌 어느 한 구석 편할 날이 없다. 가진 자는 더 가지려 하고, 권력을 쥔 자는 더 큰 권력을 누리려 하고, 힘센 나라는 힘없는 나라를 넘보는 등 탐욕으로 눈이 멀어있다.
세상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가정과 사회, 민족과 민족간, 나라와 나라간 상호 믿음과 사랑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을 믿는 이나 믿지 않은 이나 입으로만 사랑을 외칠 뿐 실천은 뒷전인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는 자기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것’이다. 자기 것을 내준다 함은 희생이 요구 되는 일이다. 많은 이들의 사랑이 머리와 가슴과 마음속에서만 맴돌 뿐 사랑을 실천하지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노래를 부르며 성탄과 새해를 맞았으면 좋겠다.
“하느님,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하느님,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림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음이나이다,“
/이용웅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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